소론(小論)

환은 환으로 치유한다.

법광스님 2024. 3. 2. 12:54

들어가며

 

연일 마약을 한 연예인 기사가 방송되고 드라마에서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사람이 죽고 태어나고 계절이 바뀌고 마음이 시시각각 바뀌는 세상에 살고 있다. `왜 나는 이런 바뀌는 세상에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걸까`를 화두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답일까 어쩌면 정답은 있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를 위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것이 지금 내가 보는 세상에 대한 격의가 아닐까 한다.

 

환상 같은 세상

 

불교에서는 일찌감치 모든 것은 변한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등 많은 정답을 경전을

통해 제시했다. 종교뿐일까 철학, 심지어 음악, 예술 작품에서 까지 얘기 하고 있지만 이것이

내 얘기가 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장대하게 미래를 계획하거나 과거에 묶여 있는 감정들을 얘기할 때 내 모습을 보면 대게 지금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이다

그런 감정들이 차곡 차곡 쌓이면 그 감정들의 크기만큼 벽을 쌓거나 보상 받고자 하는 마음에 불안하다. 그러다 궁여 직책으로 나 만의 세계 속에서 다만 안심할 뿐이다. 종교, , 드라마, 마약, 스포츠 등이 그 나마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시 적일 뿐 그런 것들이 주는 쾌락이 더 달콤할수록 현실은 더욱 처참해 질 뿐이다.

 

 

환은 환으로 치유한다.

 

그렇다면 이 환상이 나쁘기만 한걸까? 본능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쉴 수 있는 탈출구가 되어 준다면 이 현실과 환상이 조화롭게 될 수는 없는 걸까?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애니매이션 괴물의 아이에서 이런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때론 환상이 진실보다 더 진실하다라는 말이 왜 마음에 남았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환()과 같은 이 허망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 믿고 싶었던 나의 신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 때문일까 싶었다.

수행자로 산다는 일은 때론 많은 선입견과 싸워야 되는 일임을 출가 전에는 사실 실감하지 못했다. 외부의 시선보다는 내부의 시선이 더 아픈 칼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쩌면 한번 더 고민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보는 환상이 더 진실하다고 우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유익한 환상 만들기

 

수행자의 삶에서 원동력이 되어 준 수행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이나 방법의 소개는 기본적인 의무지만 이미 많은 연구와 방법은 있으니 (아직 수행이 부족하고 조심스러운 면이 있어) 단지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만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어차피 환상 속에 살고 있다면 이 환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 보자.

꼭 수행처에 가야 되고 좌복 위에 앉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그 순간,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환상은 없을까?

이미 시대는 기술의 발전으로 정신을 형상화하고 디지털화 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이런 기법을 발전시켜 왔다. 관상법이라는 수행법인데 자신이 상상으로 만든 이미지를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방법이다. 놀라운 것은 그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꽤나 구체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꼭 특정한 환각제나 외부 도움 없이 가능하다 하니 도대체 마음이란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능력을 잘 이용한다면 어쩌면 단기간에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환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환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려운 외국 이름을 가진 영웅이 부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어느 정도 조건이 충족됐을 때 가능한 일이지만 나쁘게만 생각했던 환상이 방향만 전환되면 유익해질 수 있다니 획기적인 반전이다. 불교 공부는 이런 매력이 있다. 모두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왠지 뿌듯하다.

 

 

결론

 

이 경고 문구를 본 순간 너무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역설은 오히려 전달하려는 의도를 강조 하는 효과가 있다. 그 남 직원의 환상을 지켜주고 싶다.

앞선 내용 들을 장자나 여러 인문학적인 논리를 들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문득 반야심경이 생각났다.

 

오온 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여기서 주목한 것은 비추어 볼 떄이다.

우리가 고통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타인에 비친 내 환상을 볼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환상을 경험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나의 환상과 다른 이들의 환상을

잘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비춰주는 것이 어쩌면 각자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더 이상 환상 떄문에 상처 받는 일보다는 이왕이면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환상이 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각자의 환상에서 잠깐이라도 행복하고 평안해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나쁜 습관 떄문에 내 생에도 고통 받는 다는 협박(?)과 같은 종교가 아니라 설사 그것이 환상이라도 `각자의 모습을 비춰 노력하면 얼마든지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발원해 본다.

 

2019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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