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小論)

우리는 한번도 본질을 본 적이 없다

법광스님 2024. 2. 28. 19:39

<우리는 한번도 본질을 본 적이 없다.>

-관업품·관법품에 관련해서-
 

 
 
용수의 목적은 개념으로 나열되는 법의 오류에 대한 시정이다. 불멸 이후 점점 모호해지는 붓다의 교법이 체계성이라는 명목 아래 촘촘해 지는 것을 경멸했을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개념에 붙들려 있던 사고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은 어떨 땐 허무하기 보다는 시원하다. 이 공 사상을 바탕으로 유식 이론에 설득력이 생긴다.
유식 사상에서 종자 이론을 통해 설명하려 했던 업의 이론은 공 사상과는 차별점이 있다. 공 사상에서는 바로 ‘업(業)’ 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17장 「관업품」 21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산스크리트역>
어째서 행위(karma, 業)는 생겨나지 않는가? 그것은 ‘독자적인 존재성(svabhāva, 定性)’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겨나지 않으므로 소멸하지도 않는다.
 
<한역>
모든 업은 정해진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본래 생하지 않는다.
모든 업은 그 (정해진 성품으로) 생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멸하지 않는다.
 
기존의 불교 교학에서 주장하는 업의 이론은 공 사상 앞에서는 철저하게 부정된다. 업은 자성도 없고,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업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죄업도 없고 그에 따른 과보도 없다. 즉 죄를 짓는 자도 복을 짓는 자 조차 없는 것이다.
모든 번뇌와 업, 짓는 자와 과보는 모두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 따라서 그 동안 갖가지 내가 지은 업의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 까지만 보면 머리가 띵하고 막 살아도 되는 건가 싶다. 이런 부정들은 깜깜한 절벽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용수는 불안한 정서를 갖고 살았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하지만 관법품에서 좀 더 그의 주장을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는 다만 희론(戲論_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제18장 「관법품」 5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산스크리트역>
행위의 고통(kleśa, 煩惱)를 파괴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왜냐하면 행위의 고통(kleśa,煩惱) 그것들을 조작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들은] ‘현상의 확장 (prapañca, 戱論)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현상의 확장‘은 공성에 의해서 멈추게 된다.
 
<한역>
업과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해탈이라고 부른다. 업과 번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공(空)에 들어가면 희론(戱論)이 소멸한다.
 
용수의 목적은 모든 현상을 나타내는 개념에 대한 비실재성(非實在性)을 주장하는 것이다. 개념으로는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법하신 ’자아’와 ‘무아’ 등의 가르침은 비록 언어로써 존재하지만 사실 어떤 가르침도 전함이 없게 된다. 단지 우리의 추측만 있을 뿐이다. 분별과 관념이 사라진 실상(實相)의 특징은 세간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한번도 본질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상과 실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앞서 서두에 언급했듯이 오직 인간의 인식만을 주장하는 유식 사상은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공 사상에 대안점으로 제시 된다. 물론 더 세부적으로 보면 유식 사상과 공 사상이 상이한 부분도 있지만 후대에 갈수록 절충되어 발전한다.
용수의 중관 사상을 통해 대승 불교의 큰 기틀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수를 통해 우리는 억겁의 바라밀을 닦아야 비로소 성불한다거나 전생의 악업에 때문에 고통 받는 삶이 아니라 다만 실체가 아닌 허상임을 알 때 비로소 붓다의 깨달음을 실현 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대승 불교가 시작되었다.
 
<참고 문헌>
 
용수 저, 청목 석, 구마라습 한역, 김성철 역주(2005),󰡔중론󰡕, 서울: 경서원.
프레데릭 J 저· 남수영 역(1989), 󰡔용수의 공사상 연구󰡕, 서울: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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