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小論)

무엇을 의지 하는가?

법광스님 2020. 9. 2. 18:22

무엇을 의지 하는가?

 

 개학이 며칠 안 남았다. 20년 만에 다시 시작한 대학 생활도 벌써 2년째이다.  불교학을 전공하는 것은 사실 20년 전의 나는 상상도 못 했다. 그때는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힘들게 수행자의 길을 선택했을 땐 모든 것이정리되었을 때 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로소 나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했던 순간이지 싶다. 억지로 입고 있던 맞지 않은 옷을 벗었을 때의 홀가분함도 있었다. 순탄하지 않은 길이지만 다시 그 옷을 입고 싶진 않다.

 

  다시 돌아온 대학 생활은 그때의 대학 생활과는 사뭇 다르다. 같은 학과 동기, 선배들보다는 혼자 일과를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내 공부 따라가기 바빠 주변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정보를 얻고자 가입하게 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그들의 고민이나 관심거리를 접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로나 19사태로 인한 분노를 공유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시작은 그랬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젊음의 방황은 특권이라는 것이다. 당사자들은( 물론 나도 그랬고) 앞선 이들의 꽁무니 쫓아가느라 바뻐 제대로 하소연 할 곳이 없다. 정보뿐만 아니라 익명을 빌려 올리는 자신들의 속내가 어떨 땐 안타깝기도 하다. 지금은 다 지나갈 거야라고 얘기하지만 분명 누구나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절망감을 느꼈던 시절도 있었다. 그뿐이겠는가 성에 대한 문화나 관심도 좀 더 노골적이거나 직접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에 대한 교육의 부재는 여전하다. 성교육의 부재는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특히 성별이 다른 타인 혹은 연애에 관한 고민도 상당히 같은 패턴의 글들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경험도 없고 출가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아는 사람처럼 응원의 댓글을 달거나 관심있게 글을 읽어주는 정도이다. 처음엔 댓글 하나 달기도 어색했지만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래서인지 가끔 절이나 학교에서 만나는 젊은 친구들이 낯설지 않다. 20년전 너무 추웠던 그때의 기억도 조금은 따뜻해지는 것 같다. 

 

 때론 수행자로서 이런 문화를 접하는 것을 조심스럽기도 하다. 금기시된 것들에 대한 욕구 해소로 보는가 아니면 인간이 가진 평범한 감정에 대한 이해로 보는 가는 각자의 몫이다. 나는 후자 쪽을 택했다. 생생하게 올라오는 익명의 글들을 꽤 재밌게 공감했다.  어쩌면 비겁하게 외면했던 감정들을 보기도 한다.  불법을 일찍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출가했을까? 처음 금강경을 접하고 화가 나던 순간이 떠오른다. 어떤 인연이건 충분히 무르익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삶의 무상, , 무아임을 20대의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별 볼일이 없어도 젊음이 꽃 같았던 우리에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라니. 열심히만 살면 모든 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삶이 주는 문제를 놓고 남들과 똑같은 길을 택하거나 해결해 보겠다고 깊숙이 뛰어들어 보기도 했다. 사실 남들이 가는 길도 그다지 쉬워 보이진 않았다. 그럴 바에야 `흥미로운 길을 가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이 길은 전혀 다른 길이 아니었다. 마치 도로와 인도가 평행으로 나아가듯 나란히 걷고 있다. 더 나아가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모든 일은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홀로 가는 길을 택했던 것일까?

 외부 조건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이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본다. 온전한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과 같은 바깥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다만 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들은 붙잡을 만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불법 논리를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은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려면 감정들에 솔직해야 한다. 그럴싸하고 멋진 포장을 걷어내야 한다. 옳다고 하는 고집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 안에 비치는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혹 부정적인 마음일지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찰하면서 확인되는 법에 의지해야 한다.

 

  가끔 학생들 커뮤니티에서 20년 전의 나를 만난다늘 몰아세우던 나에게 이제는 따뜻한 말을 건넬 수 있다. 안타깝게 일찍 별이 된 청춘들의 기억도 위로받을 수 있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마음은 금새 밝아진다. 아직 순수함이 남아 있어서일까? 마음의 속성이 그런 걸까? 어쩌면 다행이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크기를 넓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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